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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기-2003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다녀와서
단군은 누구신가? 檀君은 單君인가?
(참가기)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다녀와서
- 안재진(평화통일 대구시민연대
공동대표) -
남과 북이 개천절 행사를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남측)
와 단군민족통일협의회(북측)의 공동 주최로 `개천절 민족 공동 행사`가 4336(2003)년
10월 3일 평양 단군릉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필자는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일원으로 남측의 대표단에 참가하여 9월30일부터 10월4일까지 4박 5일간 평양,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등의 유적지를 순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대구지역에서는
본회의 추연창 공동대표, 이태헌회원, 필자 등 3명과 평불협회장이신 은해사 주지
법타스님이 같이 참가하였다.
방북에 앞서 9월 29일 오후에 수유리소재 통일부 교육원에서
약 3시간정도의 사전교육을 받았다.
그림1>
2003년 9월30일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한 필자
[9월 30일 인천공항]
아침 9시 남측대표단 300명은 북에서 날아온 고려항공기 2대에 나누어 타고 평양순안
비행장까지 1시간도 안되어 도착하였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어 감격에 겨워 활주로바닥에
엎디어 땅에 입맞추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필자는 거의 무느낌 상태에서 5일간의
휴가나들이를 즐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비행장에는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류미영 회장을 비롯한 여러 북측 인사들이 도열하여 남측 대표단을
맞아 주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면서 시외곽 지역의 인민들의
생활모습을 처음 보았다. 우선 땔감이 없어 산의 나무를 마구 베어서 대개가 민둥산이다.
집들은 작고 조잡하고, 우중충한데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서 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들판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일하는 모습. 아마 추수가 한창인 듯 한데
논밭의 크기에 비하여 노동자의 수가 너무 많다. 평양의 외곽지역이 피난민 수용소
같이 낙후되어 있으니 지방 시골은 얼마나 열악 할 것이가? 휴전선의
이북과 이남이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
그림2>
단군릉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난 93년 단군과
그의 아내, 유물들이 나와 94년 개천절에 맞춰 개건됐다.
따라서 단군릉은 올해가
개건 9주년이 되며 높이 70미터에 화강석 7만 2천여개로 지어진 9층 돌각담 형식으로
단군과 그의 부인 유해를 모신 무덤이다.
돌무덤은 1,994개의 화강석돌로 쌓아
무덤을 만들었고 가장 무거운 돌은 한 개가 21톤에 달한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석상으로 네 마리의 조선곰이 각기 방향을 지키고 있으며 돌곰은 그 무게가 각 90톤이나
된다. 1톤 무게의 비파형검도 사방에 세워져 당시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릉을 수호하고 있다.
북측은 지난 93년 과학적 측정을 거쳐 이 유해가 5,011년전
실존인물 단군의 유해임을 확인했다며, 단군의 키는 1m 71cm로 장대하고 60세가 넘은
장수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남측 일각에서는 이의 진위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있다.
북측은 일제시기인 1936년 이곳에 단군기념비가 세워진 것을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림3>
개천절 민족공동행사에 참석한 남.북.해외 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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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본행사가 끝난 뒤
단군릉 맨 아래쪽에 마련된 임시무대에서 북측의 예술공연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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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남과 북이 스쳐지나가는 동안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되는데로 마구
서로 반가이 손을 마주 잡았다. 마음에서 나오는데로 인사말을 해대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납시다. 통일이되면 꼭 다시 만납시다. 통일이 안되더라도
다시 만납시다. 감사합니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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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동포를 보내는 마음이나 떠나는 마음이나 슬프기는 매한가지 였다. 옆에서 “아~눈물나네”라고
말하는 분이 있어 보니, 서울에서 전직 구청장하셨던 분이 눈물을 훔치신다. 나도
마음 한구석이 얼어붙고, 코끝이 시큰거린다. 무어라고 형언할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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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구월산의 삼성사를 참배하고 추연창대표와 갈대밭 속에서 잠시 북녘의 가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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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8>
2003년 10월 4일 평양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장 찍었다.백두산 정상에서 못 찍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혹 뒤에 가시는 회원이여 꼭 찍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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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내의 보통문을 지나 대동강 안의 섬( 양각도)에 있는 양각도 국제호텔에
여장을 풀고 여기서 4박 5일 동안 묵었다.
이날 오후에 만경대고향집(김일성주석이
태어난 곳)과 인민소년학습궁전을 구경하고, 소년소녀들이 만든 공연을 관람하였다.
어린이들의 일사 분란한 몸짓과 흥겨운 공연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미 남에서
TV를 통하여 본적이 있었지만 실연을 보니 정말로 기특하고, 놀라웠다.
열렬한
전원기립박수로 화답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북측에서 초대하는 환영만찬에 참석하였다.
북측은
여행기간동안 한식으로 음식을 내어놓았는데, 음식의 특징은 인공조미료의 첨가가
없어 대체로 담백하였다. 우리 입맛에 비하여 덜맵고 덜짜게 먹는 것 같았다. 좀
심심한 맛을 즐기는 것 같았고 ,우리가 먹는 빨간 양념김치는 없었고, 대신 불그스레한
물김치 같은 것이 그쪽의 김치였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음식은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날
저녁 만찬후 우리끼리 옆길로 새서 가서 먹은 단고기탕은 정말 우리 입맛에 딱 맞아
일품이었다. 평양에 오면 꼭 먹어보라는 것이 단고기와 평양냉면이라고 했는데, 대전에서온
추연창대표의 후배덕분에 소원을 풀었다.
저녁에 호텔방에 돌아와서 룸메이트와
인사를 나누었다.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이재봉교수 였는데, 이교수는 명함대신 자신이
직접 만드는 ‘남이랑북이랑’ 소식지를 나에게 건넸다. 그는 5년만에 평양에 다시
오게 되었는데 평양이 다시 숨을 쉬고 생명력을 되찿았는 것을 보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다고 하였다. 이날 나는 온몸은 극도로 피곤하였으나 정신적 충격이 커서 선잠만
잤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북은 너무나 암울하였다. 이상한 나라다. 왜 이렇게
밖에 살수 없는 것일까? 여기가 인민을 받들고 사는 인민의 천국이라는 말인가. 집단으로
최면을 건 것은 아닌가? 여행기간 내내 한번도 푹 잘 잘 수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10월1일 백두산 출발]
오전 6시에 백두산으로 가기 위하여 버스로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8시에 평양발
삼지연행 국내선 비행기에 탑승하여 해발 약 14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삼지연공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다시 버스로 2 시간가량 이동하여 백두산천지 바로
밑에 있는 백두역까지 갔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삭도로 올라간다.
이때까지의
날씨는 비교적 순조로워서 천지를 볼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했으나, 막상
정상에 도달하여 삭도에서 내려보니 엄청난 바람과 안개구름 때문에 한치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바닥은 날카로운 얼음판이었고, 바람에 내몸이 날려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손이 시려서 대단히 애를 먹었다. 추울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장갑은
미쳐 준비를 못했는데 회원여러분 이것이 비장의 무기입니다. 같이 간 모 회원은
여기서 손을 다쳐서 치료까지 받았다.
백두산에서 천제를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특히 우리(추대표와 필자)는 당초 한반도 티셔츠를 입고 우리회의 프랭카드를
펼쳐서 백두산 천지에서 사진을 찍으려 준비해 갔으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은
기상조건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백두산관광을 포함한 행사 전반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없어서 참가자들의 원성이 높았다. 당초의 여행계획은 5박6일이었는데
4박5일로 축소되었고, 백두산관광은 대표단 300명중 50명은 못하게 되어서 불만이
컸다. 북과의 communication gap이 많아서 인지, 행사진행 실무진의 능력부족인지,
여하튼 다음에는 이런일이 생기지 않아야 되겠다. 8.15 행사에 참석했던 이태헌회원의
말에 의하면 이 행사때에는 상당히 계획적으로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대접도 더 좋았다고
하였다.
백두산에서 내려와서 백두산밀영사령부(항일빨치산 유적지)를 보았는데
여기에서 김정일이 김일성과 김정숙사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이곳의 산봉우리에
사진에서 자주 보아온 정일봉이 있었다. 오후에 삼지연 호수가에 있는 혁명사적지의
김일성동상과 조각상들을 보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서 보는이를 압도하는
듯 하였다. 이처럼 오지의 고원지대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동상과 조각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인민들은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하는 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편
무력으로 투쟁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대한 군상들은 정말로 항일정신을 표현하는
위대한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북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러시아의 모스코바에 있는 전승기념관 등에서
본 거대한 조각물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아마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호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또한 역동감 넘치는 것으로는 미국의 워싱톤에 있는 2차대전때
‘이오시마’섬 탈환시에 성조기를 꽂는 동상에 견줄만하였다. 다시 비행기로 평양에
돌아와서 춥고 고단했던 하루를 쉬었다.
[10월2일 묘향산 관광]
아침 8시에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났다. 출근시간이지만 교통체중은 전혀
없었고 2시간을 달려 묘향산에 도착하여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각국 사절들에게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국제친선 전람관을 먼저 둘러 보았다. 제일 마지막
방에는 김일성을 실제 모습과 똑같이 만든 밀납인형(?)이 있었는데 우리측
사람이 고개 숙여 예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약간은 의외라는 느낌이었느데, 갑자기
임수경이 생각 났다. 그때가 1989년 7월의 사건이었다. 그 당시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빨갱이 짓이다 라고 할 것 같은데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때마침
5대 명산이고, 조선8경중의 하나인 묘향산은 단풍철이 일렀지만 자연그대로
보존한 비로봉(1,909m) 아래 묘향천, 상원동, 만독동 일대에서 가을의 청취에 흠뻑
빠져 다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야외에서 삼삼오오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11세기초의 우리나라 건축술을 대표하는 보현사를 찾아 경내의 8각
13층탑 등을 둘러보고 사명대사와 서산대사의 영정에 참배하였다. 향로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864미터 높이에 있는 단군굴과 단군대 등은 설명만 듣고
멀리서 상상하였다.
[10월 3일 개천절행사]
정말로 가을하늘은 높고 푸르며 쾌청하였다. 북측은 단군릉을 1994년에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엄청난 규모로 개건하여 놓았다. 45정보의 면적에 개건비
구역, 석인상 구역, 무덤 구역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무덤은 집안(輯安)의 장군총
모양의 3배, 높이 22미터, 한 변의 길이 50미터의 돌각담 무덤(피라미드)이며 그
속의 묘실에는 단군의 초상이 걸려 있고 단군 내외의 유골을 관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부분 부분의 유골을 맞추어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것을 또 전자상자성 공명법을
적용하여 5011년(1993년 현재) 전의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고증해 놓고 있다.
단군릉
앞에서 제를 지내고 개천절 민족 공동 행사를 거행하였다. 단기 4336년 개천절을
맞아 작년에 이어 남북해외동포 1,500여명이 평양 단군릉에 한데 모여 시조 단군의
홍익인간과 이화세계(理化世界)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통일을 이룩하자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식은 남북 대표의 기념사가 있었는데, 우리 민족은 단군아래 둘이
아닌 하나의 자손이고, 개천절 민족 공동 행사를 통하여 온겨레가 통일의
길을 달려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였다.
본 행사후에 참가자들은
단군릉 맨 아래쪽에 임시로 마련된 무대에서 행한 북측의 태권도 시범과 남북측의
예술공연을 관람했다. 남측은 검무를 비롯해 기천문 박사규 문주의 기천무등을
시연했다.
뜨거운 햇볕 속에 1시간여의 본행사와 1시간 반가량의 문예행사로
다소 지쳤지만 남측 대표단은 단군릉 석실 안에 모셔진 단군과 부인의 유해가 담긴
관을 직접 둘러보았다.
실제로 묘실안에는 관만 있어서 볼것이 없었다. 그관도
목관이어서 아무것도 볼 수없어서 아쉬웠다.
점심에는 옥류관대신 청류관에서
냉면을 먹었다. 역시 옥류관이 아니어서인지 식사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웠다.
오후에는
평양시내에 단군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 같은 곳을 참배하고 기념품 가게에서 쇼핑을
하였다.
지하철 시승이 있었다. 지하철 부흥역에서 타고 영광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가였다. 옆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 청년이 손을
잡아주었다. 한 여성도 수줍게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거기에 뜨거운 우리의
피가 전류처럼 흘러 내몸이 찌릿찌릿하였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름다운
만남이랄 수도 있으나 비극의 역사를 서로 삼키며 잡은 손에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겠는가!
한편, 2일 오전 9시 남측 단군학회(명예회장 김정배 고려대
교수)와 북측 조선력사학회(위원장 허종호)는 평양 인민문화궁전 원탁회의실에서,
작년 개천절 남북공동행사에서 진행된 첫 토론회에 이어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남북의 학자들은 우리민족이
단군을 건국신화로 한 단일민족임을 확인하고 민족의 공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학술교류와
연대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것을 합의했다.
단상에는 북측 류미영 회장과
남측 황우연 상임준비위원장을 비롯해 남측의 단군학회와 북측의 조선력사학회를
대표한 역사학자 9명, 토론석상에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남북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20여명이 자리를 같이 했다. 객석에는 북측 방청객 100여명이
참석해 토론회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단군을 실제인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북측의
핵심이었다.
저녁에 환송연이 있었다. 남측 대표인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한양원 위원장은 이번 개천절 민족 공동행사는 통일 의지와 우리가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민족 동질감을 확인하는 뜻깊은 행사였다고 평가하였고 남북이 박수를 보냈다.
[10월4일 구월산 삼성사 참배]
전날 단군릉에서 개천절 행사에 함께 한 대표단은 북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구월산
삼성사를 찾았다. 이른 아침 7시 30분경 양각도호텔을 출발한 남측 대표단은 남포와
서해갑문을 거쳐 구월산 삼성사에 10시 10분경 도착했다. 북은 일제가 한일합방이
되자 제일 먼저 불태워버린 삼성사를 민족종교의 중요한 성지로서 개건했다. 2001년
복원하여 원시조인 단군, 단군의 아버지 환웅, 단군의 할아버지 환인 삼성(三聖)의
천진(天眞)을 모셔 놓았다. 김관철 강사는 "이 근처는 장단경, 아사달,
단군샘 등 단군 관련 명소가 많다"고 소개하고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종사가 일제에 의해 온갖 탄압과 박해를 받아 일제에 대한 항거로 1916년 음력
8월 15일 삼성전 안에서 숨을 쉬지 않고 자결했다"고 해설했다. 이날
삼성전의 단군 할아버지는 마치 우리의 몇 대 할아버지인양 가깝게 느껴지며 민족의
핏줄을 진하게 연결해 주는 것 같았다.
남측 참가단은 삼성사 참관을 마치고
근처 계곡에서 야외식사를 했으며, 일부는 인근에 있는 국보 제75호 월정사를 둘러보기도
했다.
양각도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다르게 신천, 사리원을 거쳐왔다.
구월산을
오가며 바라본 북한 농촌은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농촌에는 자전거가 많이
보급되어 있었으며, 트럭의 짐칸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고 이동하는 낙후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혹독하고 긴 고난의 시기와 어려움은 한풀 넘긴 듯한 모습이었다.
새까맣게 거을른 얼굴, 먼지는 푹 뒤집어쓰고, 남루한 의복, 작고 왜소한 체격에
잔뜩 짐보따리를 울러메고 다니는 사람들, 꽤째째한 아이들은 흙에서 땅을 파고 놀고
있었다. 북녘의 산하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우리 동포들의 어렵고 삶에 찌던
모습이 안쓰럽다.
참가단은 양각도호텔 접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했으며, 버스 안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공항에서 북측 단통협
류미영 회장 등 북측 주석단의 환송을 받으며 참가단은 고려항공 JS915, 917편으로
4박 5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4일 오후 6시 25분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필자는
이 글이 끝나기 전에 서툴게나마 북에서 보고 느낀 감회를 피력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번 방북여행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빈약하거나, 잘못 되어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받았던 교육이 철저히 반공주의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을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많은데 이것은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이 물으면, 일단 한번
꼭 갔다 오시라고 권한다.
다음은 이번 방북기간중 필자가 가장 인상깊게
느꼈던 순간이다. 개천절 행사날 단군능에 움집한 1500여명의 인민들은 행사가
끝난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우리가 식장을 빠져 나갈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
사이로 우리대표단이 퇴장하였는데, 남과 북이 스쳐지나가는 동안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되는데로 마구 서로 반가이 손을 마주 잡았다. 마음에서
나오는데로 인사말을 해대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납시다. 통일이되면 꼭
다시 만납시다. 통일이 안되더라도 다시 만납시다. 감사합니다. 등등” 그리고 인민들은
우리가 다나간 한참 후에 까지 열렬히 박수로 환송해 주었다. 물론 인위적으로
모아놓은 군중이겠지만 동포를 보내는 마음이나 떠나는 마음이나 슬프기는 매한가지
였다. 옆에서 “아~눈물나네”라고 말하는 분이 있어 보니, 서울에서 전직 구청장하셨던
분이 눈물을 훔치신다. 나도 마음 한구석이 얼어붙고, 코끝이 시큰거린다.
무어라고 형언할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감싼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갇혀서
외부와 담을 쌓고 어려운 길로 내몰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이 한없이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한사람만을 섬기고 그 사람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강요당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동포라서 슬프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길이 보이는데도 한 발짝도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려는 그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우매스럽다. 이것이 사람이라면, 꼴통이라고 한다. 도와줄 수도 없고, 사귀기도
어려운 고집스러운 사람. 이들이 다른나라 사람이라면 굶어죽든 얻어맞아 죽든지
우리가 알바가 아니지 않는가? 이런 북을 도와주자고 하면 친북이니, 이적이니
하는 일부 남쪽의 분위기도 언제 좋아 질것인지 아득하다. 우리의 분단역사는 왜
이다지도 서글프단 말인가!